풍기군수 주세붕의 치적과 인삼재배 창시

신재 주세붕선생은 풍기군수로 재임시 문성공 안향(安珦)선생이 소년시절 독서하던 숙수사(宿水寺) 옛터에 선생의 사묘(祠廟)를 세워 위폐와 영정(影幀)을 봉안하고 석전례(釋奠禮)를 행하였으며 이어 강상회복(綱常恢復)을 위해 학사(學舍)를 창건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현판하면서 서원 창건의 전말(顚末)을 죽계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혀 놓았다.
『내가 풍기군수로 도임 하였을 때는 큰 가뭄이 들었고 그 이듬해는 큰 흉년이 들었는데 그해에 백운동에 회헌(晦軒)선생의 사당을 지었다. 또 그 이듬해 계묘(중종38년:1543)년에 군의 북쪽에 학사를 옮기고 회헌선생 묘전에 따로 서원을 세웠다.
이에 대하여 혹은 말하기를 심한 일이다. 그대의 처사가 그르다. 학궁(學宮)은 그렇다 하드라도 문성공의 사당과 서당에 이르러서야 문성공은 이미 국학에 종사(從祀)되어 있으며 그것은 주군(州郡)까지 미치고 있으니 어찌 다시 사당을 세울 것이며 이미 향교가 있는데 또다시 서원을 세우겠는가? 백성이 굶주리고 있는 이때에 그것은 인민을 불신하는 처가 아닌가』 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주신재입묘이상덕입원이돈학(周愼齊立廟而尙德立院而敦)의 일과 함께 풍기백성의 어려움을 구하고자 구황작물(救荒作物)과 양잠(養蠶)을 권업(勸業)하고는 북으로 이사하는 농민을 죽령에서 접대 위로 하면서 인삼재배방법(人蔘栽培方法)을 연구하여 백성에게 이를 권하고 그 재배법을 창시하여 보급하신 큰 업적을 남겼다는 또 다른 위업(偉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1. 주신재의 교학진흥 주신재는 풍기군수로 도학(道學)의 진흥에 힘써 유학
이념의 보급을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의 시행을 건의했다. 그리고 유교 윤리에 입각한 교화에 힘쓰면서 당시 향촌민에게 교육기관의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향교를 복구했다. 중종37년(1542) 순흥 죽계에 교려말의 성리학의 원조 문성공 안향(1243∼1306)의 사당인 문성묘를 설립했고 중종38년(1543) 풍기의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주자의 백록동서원을 모방하여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 문성공 안향선생을 배향 하였으며 1544년에 안축(安軸) 안보(安輔)를 추배했다.
백운동서원에서 자주 유생들과 강론하며 가장 불리한 때에 서원의 역사(役事)를 일으켜 처음에는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했으나 그의 개결(介潔)한 인격의 감화로 민심을 수려(收斂)할 수 있었으며 그 뒤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의 상주로 명실상부하게 서원의 흥학육인(興學育人)을 국가가 사액으로 인해 할 수 있게 함으로서 우리나라 최초로 서원교육에서 존현양사(尊賢養士)와 평등교육의 정통학규를 세웠다. 특히 이 서원은 명종임금이 직접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명명(命名)한 친필현판과 대제학신광한(大提學申光漢)에 명하여 사액 소수서원기를 찬(撰)하게 하고 사서오경과 성리대전 등 많은 서책과 전답 임야 노비 등을 하사하였다.
이렇게 국가의 공인된 교육기관으로 향촌사림의 정치 사회활동에 기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소수, 이산 양서원의 입원록과 입격록(入格錄)을 상고해 보면 영천(영주)과 순흥을 출입해야 사문(斯文)으로 명망을 지닐 수 있음을 짐작케 한다. 한국유학사(韓國儒學史)에 보면 회헌 안향선생의 학문상 업적을 적어 놓은 대강을 옮기면 이러하다. 안향은 고종30년(1243) 태어나 충렬왕 32년(1306)에 돌아가셨다. 초명은 유(裕)이었는데 향(珦)자가 조선조 문종임금과 동명이라 후인들이 모두 초명으로 불렀다. 호는 회헌이요. 흥주(순흥)인인데 소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원종 초에 급제하여 한림(翰林)에 오르고 여러 번 승진하여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성이다. 몽고의 침략이 있은 이래로 개경의 국학은 황폐한지 오래되었고 문교는 땅에 떨어져 사자(士子)들은 성인의 학문을 모르고 상하가 모두 이교(異敎)를 숭상하여 기불(祈佛) 또는 사신(祀神)을 일로 삼았다. 향(珦)이 일찍이 학궁에 들어갔다가 그 황막한 것을 보고 시를 읊었으니 향등(香燈) 켜진 곳마다 모두 불전의 기도요. 피리소리 집집마다
귀신의 제사 뿐이네. 어쩌다 두어간 주자의 사당 뜨락에는 봄 풀 뿐이요. 쓸쓸하게도 사람은 없네. 그래서 주신재선생은 학문에서 인의예경(仁義禮敬)의 도학(道學)을 창도(倡道)한 당세의 유종(儒宗)으로 주자의 학문을 우리학문에서 처음 개발한 문성공 안향선생을 경보(敬慕)했다. 중종20년 갑신(1525) 성리대전이 발간될 때 당시 대제학으로 있던 모재 김안국(慕齊 金安國)이 절요를 짓고 서문은 주신재가 지었다. 당대의 석학 회재 이언적과도 깊이 학문으로 교의(交誼)하였다.
2. 인삼재배의 창시(創始)
가. 인삼교역의 역사
인삼은 우리나라와 동아세아 중국 일본 등지에서만 자생(自生)하는 희귀한 약용식물(藥用植物)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의 산삼(山蔘)은 중국에 조공물(朝貢物)로 진봉(進奉) 하여왔고 여진(女眞) 일본에도 상사(賞賜) 회사(回賜)의 형식으로 관무역(官貿易)을 했던 가장 중요한 무역 상품 이였다.
옛날에는 이 인삼은 물품의 희귀성과 약품으로서 높은 약효 가치가 있었고 오늘날은 인류 건강 유지상의 필수품으로 견주어질 만치 귀하고도 필수적인 가치가 있다. 삼국사기에 살펴보면 고구려 20대 장수왕 23년 을해(435) 6월 부왕인 광개토왕이 만주지역에 국토를 확장한 뒤라 인접한 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위하여 북위(北魏)의 태무제(太武帝)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산삼을 바쳤더니 도독요해제군사정벌장군영의동이중랑장요동개국고구려왕(都督遼海諸軍事征伐將軍領議東吏中郞將遼東開國高句麗王)의 칭호를 보내왔다.
백제는 25대 무녕왕13년 계사(513) 4월에 양(梁)나라 무제(武帝)에게 사신하고 산삼을 보냈다. 신라는 26대 진흥왕49년 정해(627) 7월에 당(唐)나라 태종에게 산삼을 공물하고는 백제가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종용(慫慂)해 줄 것을 호소하는 등 중국조정에 대한 사대교인(事大交隣)을 함에 공물로 가장 가치가 높고 반기는 물품 이였다. 풍기인삼은 신라33대 성덕왕33년 갑술(734)에 당나라 현제(玄帝)에게 하정사(賀正使) 즉 신년을 축하하는 사절을 보내는데 소백산에서 캔 산삼 200근을 바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 신라 때부터 소백산에 산삼이 많이 자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조가 개창 되면서 이런 관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후기부터는 중국조정이 산삼을 품목으로 많은 양을 강요하여왔고 꼭 공물하는 의무적(義務的)인 조공물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산에는 산삼이 귀해져서 구하기가 어려워지니 바치려는 고통은 이루 말하기 어려워져 나라에서 거두어들이는 어려움 또한 큰 난제가 되었다. 고려25대 충렬왕은 원나라 제조와는 옹서지간(翁 之間)이었으니 충렬왕비 재국공주의 랑장에 장순용(張舜龍)장군 이였다.
장순용(1255∼1298)은 고려 충렬왕 때의 귀화인이다. 본명은 삼가(三哥) 회회색목(回回色目)의 사람으로 아버지 경(卿)이 원나라 세조때 벼슬하여 필도치(必 赤:원나라 벼슬)가 되었으며 장순용은 재국공주를 따라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고 랑장이 되어 누진하여 장군에 이르러 이름을 순용으로 고쳐 부르고 상국으로 가는 사신이 되어 전후 6번이나 원나라에 출입하여 사대외교(事大外交)에 크게 공헌한 사람이다. 선무장군진변관군총관(宣武將軍鎭邊管軍摠管)에 오르고 여러 벼슬을 거쳐 첨의참이(僉議參理)에 이르러 작고했다.
이분이 덕수장씨의 시조가 됨으로 충렬왕이 세자에게 선위(禪位)하고 장순용의 집에가 있으면서 덕자궁이라 불렀다. 장순용 같은 원나라에서 귀화한 능력있는 사람이 사신행차에도 가중(苛重)한 공삼의 량을 감소하게는 했어도 폐지요청은 이루지를 못했다. 또 원나라 사람이 국경을 넘어 채삼(採蔘)하는 자를 금지토록 요청했으나 그것도 뜻과 같지 않았다고 한다. 고려43대 우왕2년(1376)에는 일본 아시가(足利)가 막부(幕府)에 산삼 20근을 교역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고 명나라에 고명사신(誥命使臣)을 보내면서 산삼 500근을 보냈다. 이로서 명나라와 친선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는 해마다 명절과 명나라 황제 황태자 생일에도 각 100근씩을 바칠 것을 요구해왔다.
우리나라 궁중의 수요량 또한 증가하기만 했으니 산삼지의 백성들 부담은 가중해져 그곳 목민관의 고충 또한 늘어만 갔다. 왕조실록에 의하면 「광해군13년 신유(1621) 4월에는 산삼 천근을 명나라가 주구약탈(誅求掠奪)했다. 또 영조44년 무자(1768) 4월 평안도 관찰사 정실(鄭室)의 상소에 삼폐(蔘弊)가 심한 강경지방은 채삼을 위해 본도외(本道外)에 함경도까지 가도 10인이 입산하면 8인은 허행(虛行)하니 공삼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주민의 도망자가 늘어나 의주(義州)와 같은 국가의 십진(十鎭)까지도 파수(把守)가 허(虛)해질 염려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또 「영조48년 임진(1772) 4월 강개부사 정언충(鄭彦忠)의 장계(狀啓)는 농민은 채삼공출(採蔘供出) 때문에 농사는 뒤로하고 있습니다. 채삼을 직접 할 수 없는 자들은 곡물을 팔아 산삼을 사서 상납하기도 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전답을 팔고 가대(家垈)까지 팔다못해 처자식까지도 노비로 팔아야 하니 수화(水火)의 재난보다도 더 심합니다. 도망과 이주를 엄금하였으나 특별한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정조15년 정미(1791) 7월에 부임한 강계부사 이이상은 장계(狀啓)하기를 강개부의 호수는 원래 2만여호가 되었습니다. 삼폐(蔘弊)로 인하여 지금은 4518호로 감소되었음을 아뢰옵니다」하였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전국에 잔재하는 여지의 산삼산지도 사정은 유사(類似)하니 밀채(密埰)와 밀매(密賣)를 엄금하라고 명하고 채삼자에게는 증지(증명)를 발급하라고 팔도의 관찰사에게 엄명을 내렸으나 삼폐가 심함을 암행어사와 지방 목민관도 한결같이 그 지방의 딱한 실정을 계속 알려왔다.
그러나 상국(上國)에서의 공물을 위해 별다른 방편을 찾지 못하고 지속되어 오다가 순조조에 이르러 부족수량을 금, 은, 기명(器皿), 백면(白綿), 지(紙), 저마포(苧麻布), 마필(馬匹) 등으로 대납하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나. 인삼재배의 발상(發想)
위와 같은 인삼이 우리나라 국민에게 부하된 역사적인 여건에서 인위적으로 인삼을 생산토록 함은 산삼산지의 백성이 산삼을 찾아 나라에 바치는 고역(苦役)을 면하도록 했다는 것은 실로 위대한 발상이며 인위적 생산방법의 착상개발은 큰 발명이기도 했다. 산삼이 삼으로 인정받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재배에 의해서 나온 삼을 공납하고, 그 삼이 그 이전의 산삼과 물질이 다르다는 것을 중국의 황실이나 조정이 눈치 차리게 되었다면 조선임금에게는 기군강상(欺君岡上)의 죄를 따질 것이고 인삼을 재배하여 상국에 보낸 농민에게도 무거운 문책이 있을 것은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인삼의 인위적 재배의 시초는 공식으로 기록할 수 없는 역사적인 상황이었으니 그 시점이 어느 때부터인가는 역사적인 수수께끼에 속하는 사실일 수밖에 없다.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이 되어 백성의 고충을 덜어주는 발상을 하고 실현하는데 몸바친 위민행정이 도리어 목민관 자신에게 죄과로 부하(負荷)될 수도 있는 일임을 알고도 그 일을 백성과 함께 연구하고 발상하고 실천한 목민관이 있었다면 진실로 역사상의 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 행정관이요 목민관으로 추앙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역사적인 정세 속에서 신재 주세붕선생이 모험에 가까운 발상과 애민애족의 뜻을 당시에 역사적인 상황으로 재배에 참여한 농민과 그 자손의 구전으로만 전하는 역사적인 위업이다. 그러면 그 시대적 상황이 지금의 우리에게 어떻게 이 역사적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가? 먼저 지금 담배인삼공사의 전신인 전매청에서 발행한 풍기인삼 유래를 옮겨 소개하면, 풍기인삼은 삼국사기 서기743년<신라 성덕왕33년> 당 현제(唐 玄帝)에게 하정사(賀正使)를 보내어 삼 200근을 선물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신라시대 때 벌써 소백산에서 산삼이 많이 자생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후에는 중국에서 인삼을 요구하는 회수 수량이 점차 증가되었으며 선물에서 의무화한 곡물로 바뀌어 농가에서는 산삼을 채삼하기 위하여 패농하고 전답을 팔아 인삼을 사서 바쳐야 하는 등 그 폐단이 막심하였다.
이조 중종조 신제 주세붕선생께서 산삼에만 의존하던 것을 인위적으로 재배 생산케 하여 그 수요를 충족케 하고자 전국에 인삼이 자생하는 토양과 기후가 비슷한 곳을 찾던 중 1541년 풍기군수로 취임하셔서 풍기의 토양과 기후를 조사한 결과 산삼이 많이 자생할 뿐 아니라 인삼재배지로서 가장 적합한 곳임을 발견하시고 풍기에서 제일 처음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삼재배를 시작하였으며 구의 왕가에서는 풍기인삼만을 애용하였다는 사기가 있음. 풍기인삼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분기점인 영남의 북단에 위치한 풍기를 중심으로 재배되었으며 기후 풍토는 해발 400∼500의 고원지대로 내후성 한냉기후가 형성되어 늘 통풍이 잘되고 사질양토로 배수가 양호하여 적년(適년年) 채굴하여 내용 조직이 충실하고 약성이 충분히 축적된 후인 백로를 중심으로 채굴하고 있음. 풍기인삼의 효능은 산삼과 비슷하여 타지방 어느 곳보다 우수하며 소량은 체중을 증가, 다량은 감소시키며 진정작용, 항암작용, 혈압강화, 피로회복, 식욕증진, 혈당강화, 적혈구 양을 증가시키는 등 신진대사 모든 기능에 효과가 있음. 이러한 풍기인삼 유래의 설명으로 미루어 인간에 의해서 인삼이 재배된 것은 신재 주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47세때인 중종36년(1541) 5월부터 명종원년(1545) 성균관 사성의 내직으로 옮기었던 시기에 재배법의 개발연구가 시작되었다고 추상할 수 있다.
그리고 5년 뒤 선생이 성균관 사성으로 재임할 때 풍기군민은 선정비를 세워(현재 풍기읍 소정원에 있음) 신재의 선정과 업적을 찬양했다. 그 비문에 흥리혁폐(興利革弊)란 문자가 적혀있는데 이 말이 삼폐를 해소하고 민심을 혁신하여 삼농민과 풍기군민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인 듯하다. 전하는 말로 선생이 풍기에 재임할 때 관가의 정원에도 삼을 심어 두었으나 밖으로는 숨겼다고 한다.
또 이 사실을 암시하는 기록으로는 정조때의 실학자 서유거(徐有渠 1764∼1845)의 임원16지(林園十六志) 관휴지(灌畦志) 인삼조(人蔘條)에 가종(家種)의 법은 영남의 풍기가 나라에서 유일산지(唯一産地)였고 풍기에서 시작되어 국내 여러 곳에 보편화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인삼재배를 적은 것은 선생이 풍기에서 재배를 시작하고 230년 뒤인데 중국과의 교역에서도 인삼이 공물로 무사히 통과된 정조14년(1790)의 7월조에 내의원 제조(提調) 홍억(洪檍)의 계(啓)에 가삼이 성행 후 경상·원춘(原春: 강원) 양도의 봉지(封地)에는 가삼이 많았다고 적고 있으며 재배삼을 가삼이라 기록한 것도 이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또 적기를 원춘도(原春道)는 산지가 아니므로 경상도산 가삼을 경상(京商)에게 사서 봉진(封進)하였다 라고 적혔으니 이로서 풍기의 인삼재배가 최초임이 국내에 알려졌으며, 서울상가에 가삼이 거래되고 있음이 일반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정조15년(1781) 2월조에 적히기를 평안도 관찰사 심이지의 장계에 산중채삼의 고통 해결책으로 영남의 가종법을 배워야 하니 의당관서의 도신에게 명하여 거행함이 가하다라고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면 18세기말까지 평안도에서는 산삼을 찾아 헤매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평안도는 정조15년(1781)에 그곳의 관아 아전을 풍기에 보내어 인삼재배법을 배우게 했던 것도 알 수 있다. 풍기 삼농 하던 백성은 군수 신재 주세붕 선생의 발상으로 16세기 중엽에 이미 세계 최초로 인삼을 자연산에서 경작재배 생산법으로 개발하였다. 그리고 공납량을 바치고는 남은 인삼은 고가로 팔아 다른 고을 사람들 보다 부유히 살게 되었다.
이 인삼의 농산물의 생산은 그때의 시대적 현실이 세간에 알려지지 못하는 비밀에 속하는 사항이었다. 지금도 삼정(蔘精) 또는 산양(山養)이라 부르는 산삼의 종자를 채취하여 자신이 관리하는 산의 좋은 자리를 골라 파종하거나 묘삼을 심어서 상당히 오랜 기간을 키우는 삼농인이 있다. 이런 인삼재배 방법이 그 옛날의 인삼재배 법인 듯 하다. 융희 원년 순종 정미년(1907)에 개성과 함께 발족한 풍기인삼조합 연혁에 약 500년전인 중종때 군수 주세붕선생이 군수 재임시에 인삼의 재배법이 개발되었고 그것이 비밀리에 장려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이 표현이 인삼의 인위적 재배의 시초는 기록의 처음이다. 3. 문민공 주세붕선생 송덕비문 정용팔보(鄭鏞八甫)가 찬한 “문민공 주선생 송덕비” 전문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인삼의 종주국으로 한국이면 곧 인삼을 연상케 하나 인삼에만 의존하여 우리가 조선 중종때에 문민공 신재 주세붕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중(서기 1541∼5)에 당시 국민의 징삼(徵蔘) 의무를 덜어주기 위하여 삼재배법을 개발 보급한 것이며, 그 기원으로서 현재는 국내 수요 외에도 세계 각국으로 수출되어 농작물 중에서 적은 면적으로 가장 많은 외화획득을 하고 있는 천혜의 자원으로 생약제에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보재(寶材)로 인류보건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선생의 본관은 상주. 자는 경유(景游). 호는 신재요. 부는 참판공 문보(文 ). 모는 정부인 창원황씨이며 성종26년 10월 25일 출생. 유시부터 효우에 지극하였으며 18세에 향시에서 장원하고 28세에 사마 및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사가 호당한 후 각 요직을 역임하고 47세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권학유례 하니 군민이 감화되었고, 익년 국내 처음으로 백운동 현 소수서원을 세워 양사 하였으며 기민을 구휼하고 구황농법을 지도하며 당시 주민의 가장 큰 고민이며 지방관과 조정의 난제로 중국과의 교인상의 필수품이던 산삼징납을 대체할 삼재배법을 개발 보급함으로 흥리혁폐(興利革弊)를 감행하였음은 모험적인 위국충성으로서 초범(超凡)의 치적이 아닐 수 없다.
선생은 다시 직제학 도승지 호조참판을 역임 55세에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해주에도 수양서원(首陽書院)을 창건하였고 성균관 대사성 동지 경연 등을 역임 하다가 명종 9년 7월 2일 60세로 생을 마쳤다. 선생은 성리학의 탐구와 경(敬), 의(義)를 신조로 하여 사치를 버리고 실천에 힘쓰고 부친상을 당하여 3년을 수려(守廬)하였다.
중종, 인종, 명종 삼조의 진신(藎臣)이며 청백리에 녹선된 청렴강직 한 당대의 유종으로 천고에 없는 위업을 남기셨다. 옛날 교역하던 산삼은 보화와 같았으나 백성에게는 귀하고 거의 없는 의무적으로 매년 많은 량을 공납하여야만 하는 기록 못다 할 가진 고생을 다하였으나 이 고충을 해소하고 재배법을 보화로 돌려주신 인삼재배의 원조 문민공 주선생에게 감사하며 천하에 선생의 빛난 업적을 밝히고 길이 찬송하며 삼의 본고장에 지역민의 성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다시 새겨 선생의 높은 뜻은 온 누리에 배움의 길을 열어 놓았고 선생의 끼친 업적은 온 겨레의 삶을 도왔도다.
소백산 두솔봉의 외외한 모습 선생의 덕(德)·혜(惠)를 우러러 상징하여라. 백약의 영초 이제 삼막에 의의하니 선생의 넋이 오늘도 어려 계신 듯 여기 이 비에 뭇사람의 정성을 새겨 담아 길이 공덕을 추모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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