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치령(古峙嶺)아래의 대궐터
고치령(古峙嶺, 760m)은 경북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서 마락리로 넘어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의 재(고개)로서 충북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삿갓면)을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고치령 정상 표석에는 "신라때 이 고개 아래에다 대궐터를 잡으면서 옛고개라 부르다 차차 변하여 고치령이라 하였다"라고 안내되어 있다. 아마도 '옛고개'를 한자어를 붙여 고치(古:예고, 峙:언덕치, 고개치, 재치)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고치령이라 부르지만 20-30년 전만해도 이곳 사람들은 '고칫재'라 불렀다.
그르면 '대궐터'란 어디일까?
어릴적 할머니들로부터 궁터, 대궐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죄석리 사람들은 망바위, 도둑바위를 지나 좌측 골짜기로 올라가면 궁터(넓은 터)가 있고 궁터 근처에는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다고 했다.
2011.6.6(월,현충일,단오) 대궐터를 찾아나섰다.
06:00 답사팀(백윤흠,권오찬, 이동춘, 이원식)은 영주를 출발하여 단산면 좌석리에서 현지주민(김종예,김태진,최우철)과 합류하여 망바위 윗쪽 골짜기로 답사를 시도했으나 도무지 길을 열 수 없어 고추령 정상에서 백두대간 길을따라 국망봉 방향으로 향했다.
고치령에서 국망봉 방향으로 1.3Km 지점에서부터 기와 파편이 보이기 시작하여 1.9Km 지점까지 여러군데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기왓장은 조각도았고 온전한 기와도 있다.
이 근처 능선에는 돌과 흙으로 쌓은 산성 흔적이 있고 50-60평 정도 되는 넓은 공터도 있어 아마도 성이나 봉화대가 있던 자리가 아닐까? 추정해 보기도 한다.
영주의 고대사(古代史)를 연구했던 고 최현교(2007 작고) 선생이 고서(古書)를 분석하여 얻은 결과에 의하면 고구려 장수왕은 481(정확하지 않음)년 고치령으로 신라를 침공했는데 고치령 남쪽 협곡에서 모산성을 지키던 신라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전멸하다시피 퇴각했고 분함을 참지못한 장수왕은 8년 뒤 마구령(부석-남대)으로 침공하여 신라군을 무너뜨리고 남쪽으로 진격하여 철탄산 뒤쪽 성재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있었고 승기를 잡은 장수왕부대는 경북 청송까지 밀고 내려갔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정확한 기록이나 증거는 찾을 수 없으나 2005년 2월-2007 작고하기 전까지 필자가 여러번 전해들었었다.
영주시 단산면 옥대3리의 마을 이름이 모산이다. 들(논)도 있고 물도 있어 성이 있을 만한 위치라고도 생각된다.
그렇다면 궁궐터에서 발견되고 있는 기와들은 무엇일가? 산등성이에 대궐이나 궁은 아닌것 같고!
옛 모산성이거나 모산성의 전방 초소가 있던 망대나, 봉화대가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한다.
이 분야 관심있는 분이나 궁터, 대궐터, 모산성에 대해 연구하신분, 옛 궁터이야기를 알고 계시분의 조언 있으시길 희망한다.
연락처:010-4503-7586 이원식
고치령(고칫재)
발견된 기왓장
성의 흔적
성의 정문 같은 문바위/고추령에서 국망봉 방향 1.9Km 지점 남쪽
이야기 속의 바위
대문바위 상단 바위 끝에 구렁이 형상의 소나무와 두꺼비가 기어오르는 모양의 바위
망바위
산적의 망대 역할을 했던 망바위/멀리 사람이 나타나면 도적바위 쪽으로 신호 보냄
도적바위
굴속에 사람 20여명이 들어 설 수 있는 공간이 있음/사람들은 도적의 소굴이라 칭함
1970년대까지 단산면 박물장수(할머니)가 이길을 따라 강원도 광산지역을 오가며 장사하던길
그래서 산도독이 많았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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